5월 말...

 

우리 나라.우리 가정에 큰 일이 참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.

유달리 몸과 맘이 무거운 날이다...그래도 가봐야지...밥도 먹기 싫고 빵 몇조각에 우유 한컵 마시고 나왔다.아무리 힘들어도 자전거 패달만 밟으면 역시 잘 나왔어,와 신난다~저절로 행복한 사람으로 변신하는데 오늘은 안그렇다.텃밭까지 갈 길이 너무 멀다 싶고 몸은 자꾸 자꾸 더 무거워진다.쌩~하니 달릴 길을 가다쉬다 하면서 억지로 왔다.

 

자전거를 잘 묶어 놓고 산길을 오르는데 잠시 등산로 입구 칼국수.수제비 집을 기웃거려본다.혹시 아는 얼굴 없나...탁주 한사발만 얻어 마시면 오늘 일 잘하겠구만...역시나 아무도 없다.괜히 짜증난다.텃밭까지 산길로 5~6분,그 길이 천리만리다.내 기분이 우울해서 몸이 힘든거야,밥을 안먹어 이런거야...나도 알길 없이 마냥 무겁고 힘이 든다.

 

상추는 풍성하게 잘 자라 있는데 쑥갓은 아예 나무 숲이 돼 있고,근대는 여전히 조막조막 하고,시금치는...시금치는 잎도 잘 자라지 않았는데 누렇게 변해있다.그 옆에 심어놓은 고추모종 몇개도 새들새들 노란 잎을 달고 있다.뭐가 문제지...얘들이 왜 이럴까? 상식없는 머리를 굴리는데 팔 다리 마음은 금방 누가 내게 바윗덩이를 안겨준 기분이다.오늘 진짜 나오지 말걸...상추.쑥갓은 꼭 뜯어줘야 하는데 도무지 힘이 안난다.밭을 이래 놓고 그냥 갈 수도 없고...아...어쩐다...

 

그냥 쭈그리고 앉아 상추부터 뜯었다,쑥갓도 뜯었다,누런 시금치도 뽑고 근대도 솎고 아예 주저앉아 별 생각없이 손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데

"이거 상추 맛있겠네.나한테 조금만 팔아요?"

 

엉? 돌아보니 할머니가 허리굽혀 내 상추를 잔잔히 쳐다보신다.

"아이고,할머니 이거 파는거 아니예요"

"나한테 좀 팔아요.상추 참 맛있겠네"

"할머니! 저 안팔아요.그냥 조금 가져 가세요"

"나한테 좀 팔아요."
"할머니!! 그냥 좀 가져가세요! 저쪽에서 좀 뜯어가세요."

 

할머니는  건너편 쪽에서 조심조심 상추를 뜯는다.

"할머니,쑥갓도 뜯어가세요.많아요"

쑥갓도 조심조심 뜯는다.

"할머니,상추 참 맛있어 보이죠?"

"예~아이 젊은 사람이 이런것도 다 하고..."

 

내 몸 무겁다고 안그래도 없는 시간 다 허비해버려 이걸 언제 다 뽑나 생각했는데 할머니 덕분에 밭이 잘 정돈됐다.

"자-2000원만 받아요"

"어마,할머니 저 파는거 아니예요.저 돈 안받아요."

"아니요,받아요."
"아니...안받아요.저 돈 안받아요!!!"

"아니,받아요.젊은 사람은 재미로 이런다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어디 이런 고운 상추 아무데서나 먹을수 있나...안받고 싶겠지만 나는 그러면 이게 목구멍에 안넘어가지..."

 

이 얼마나 겸손하고 반듯한 생각이신가...할머니가 상추밭 속에 놓고간 똘똘 말은 2000원을 보며 나는 세 평도 안되는 내 밭위에 자라고 있는 상추며 쑥갓들이 갑자기 참으로 값지게 느껴진다.마치 깨끗한 온천욕을 하고난 기분이 든다.

할머니...할머니가 주신 2000원요...내년에 뿌릴 씨앗 값으로 쓸께요...